문학과 책, 그리고 작가 (49) 썸네일형 리스트형 김애란, <가리는 손> 中 기억에 남는 문장들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 해수면이 어제보다 조금 솟아 있다. 오전내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십자가도 물에 젖는다. 낮에 시장에서 사온 우럭 두 마리를 도마로 옮긴다. 칼 쥔 손에 힘을 주자 생선 뼈와 근육, 살 으스러지는 감촉이 몸 전체로 번진다. 손아귀 속 떨림이 흐린 원을 그리며 내 몸 가장 먼 데까지 퍼진다. 반쯤 살아 있는 식재료를 만지면 늘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금기이되 아주 오랫동안 어겨온 금기를 깨는, 죽은 것을 죽이는, 심드렁한 희열과 혐오가 인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중 p.187 청결에는 청결의 관성이, 얼룩에는 얼룩의 관성이 있음을 실감한 건 재이 초등학생 때 일이다. 내가 재이에게 경외감을 느낀 그 크리스마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재이는 성가대 대표 선출 ..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 송찬호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입안의 비린내를 헹궈내고 달이 솟아오르는 창가 그의 옆에 앉는다 이미 궁기는 감춰두었건만 손을 핥고 연신 등을 부벼대는 이 마음의 비린내를 어쩐다? 나는 처마 끝 달의 찬장을 열고 맑게 씻은 접시 하나 꺼낸다 오늘 저녁엔 내어줄 게 아무것도 없구나 여기이 희고 둥근 것이나 핥아보렴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문학과지성 시인선 359) 문명화된 어른들에게 들려주는 시인의 동화적 세계관 『고양이가 돌아오는 저녁』. 자신의 삶 주변에서 동화를 재발견하여 한 편의 '시'로 완성하는 시인의 작품이 펼쳐진다. 문명비판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는 시인은, 자연의 힘을 빌려서 차갑게 현실의 구조를 장악한 문명의 권력에 맞선다. 자신만의 시점과 어법으로 부드러운 통합적 .. '사람답게'와 도덕성 / 김애란, <가리는 손> | 소설 감상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나’가 생일을 맞이한 아들 재이의 저녁식사 준비를 하면서 시작된다. 서술자인 ‘나’가 요리를 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주된 사건은 재이가 목격한 노인 폭행 사건과 다문화 가정에 대한 이야기이다. ‘나’는 남편과 이혼하고 홀로 재이를 키운다. 재이는 주변 사람들에게 외모가 다르다는 이유로 특별한 아이로 취급된다. ‘나’는 그런 재이를 올곧게 키우려고 노력한다. 폭행 사건에 연루되어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 때도 재이가 상처받지 않을까 노심초사하고, 친구들에게 놀림을 받을 때에도 재이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폭행 사건 동영상을 보고 재이가 ‘틀딱’이라는 말을 하며 미소 지었을 때 재이가 노인을 보며 웃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 21이 사랑한 작가 박상영② 욕심 많은 무소유자 박상영 21이 사랑한 작가 박상영② 욕심 많은 무소유자 박상영 h21.hani.co.kr ♡ 인터뷰를 마친 뒤 책 세 권의 맨 앞장에 박상영의 서명을 받았다. 서명에 공통적으로 들어가는 단어는 ‘사랑’이었다. 첫 책인 엔 “그때는 몰랐었어 누굴 ♡하는 법”, 엔 “Love 수경♡ 우주만큼 행복하세요”, 엔 “Love 수경 따뜻한 밤 되세용”이 적혔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은 결국 사랑이었다. 보통의 존재들의 사랑, 그것은 자신을 향한 사랑이기도 하다. *출처 : 장수경 기자, 한겨레21([21이 사랑한 작가들] 21이 사랑한 작가 박상영② 욕심 많은 무소유자 박상영) 최고의 악역, 미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드라마를 즐겨 봤습니다. 드라마에 나오는 등장인물들과 배경, 사건들이 생생하게 그려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면 참 다양한 성격의 캐릭터가 등장하는데, 저는 그중에서도 매력적인 악역 캐릭터가 끌리더라고요. 의 신성록이라든가, 의 궁예 같은 경우가 그런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오늘 이 두 악역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하는 건 아닙니다. 저는 오늘 의 미실에 대해서 얘기하려고 합니다. 2009년 MBC에서 방영한 은 선덕여왕 신드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풍성한 볼거리와 탄탄한 스토리로 매회 시청률을 경신했는데, 그런 의 시청률을 견인한 가장 큰 공신은 바로 미실 역의 고현정이었습니다. 첫 회 등장했을 때부터 사람을 인정사정없이 죽이는 미실의 미친 카리스마에 시청자들 대부분이.. 김애란, <입동> 中 기억에 남는 문장들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 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그래도 나쁜 생각은 되도록 안 하려 했다. 세상 모든 가장이 겪는 불안 중 그나마 나은 불안을 택한 거라 믿으려고 애썼.. 가방 / 송찬호 가방 / 송찬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2008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기나긴 겨울의 시작 / 김애란, <입동> | 소설 감상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사건. 우리는 그 사건을 '세월호 참사'라고 부른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귀한 목숨을 잃어 바라보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놀라움을 자아냈던 세월호 참사. 우리는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사람들은 처음에 어린 학생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했다. 직접 안산의 단원고를 찾아 애도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애도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는, 유가족들만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애도를 지켜보면서 그만 털고 일어나라며 채찍질을 해댔다. 그것은 유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우리는 위로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유가족들에게 폭력을 .. 이전 1 ··· 3 4 5 6 7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