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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책, 그리고 작가/소설을 음미하며

김애란, <가리는 손> 中 기억에 남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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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 해수면이 어제보다 조금 솟아 있다. 오전내 비가 내렸다. 비가 오면 십자가도 물에 젖는다. 낮에 시장에서 사온 우럭 두 마리를 도마로 옮긴다. 칼 쥔 손에 힘을 주자 생선 뼈와 근육, 살 으스러지는 감촉이 몸 전체로 번진다. 손아귀 속 떨림이 흐린 원을 그리며 내 몸 가장 먼 데까지 퍼진다. 반쯤 살아 있는 식재료를 만지면 늘 개운치 않은 기분이 든다. 금기이되 아주 오랫동안 어겨온 금기를 깨는, 죽은 것을 죽이는, 심드렁한 희열과 혐오가 인다.

김애란, ⌜바깥은 여름⌟ 중 <가리는 손> p.187

청결에는 청결의 관성이, 얼룩에는 얼룩의 관성이 있음을 실감한 건 재이 초등학생 때 일이다. 내가 재이에게 경외감을 느낀 그 크리스마스 행사를 며칠 앞두고 재이는 성가대 대표 선출 선거에서 세 표 차로 졌다. 한창 클 때 이기고 지는 거야 별일 아니지만, 한 투표용지에 좀 모욕적인 문구가 적혀 있었나보다. 사회를 보던 아이가 경솔하게 그걸 또 읽었고 분위기가 싸해진 가운데 몇몇이 작게 웃었다고. 재이는 그때 누가 웃나 너무 궁금했지만 몸이 굳어 돌아보지 못했단다. 실은 선거에서 진 것보다 그 웃음소리가 더 견디기 힘들었다고. 반년 전 교회에서 일어난 일을 학교 담임 선생님에게 듣는데 가슴이 죄어왔다. 그동안 재이 마음을 전혀 몰랐다는 데 죄책감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지지해준 절반이 있어도 무리에서 부정당한 느낌이었겠지. 선량한 친구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혹시 넌가?' '너였을까?'하는 의심을 피할 수 없었을 테니까. 시간이 매일 뺨을 때리고 지나가는 기분이었을 거야.

김애란, ⌜바깥은 여름⌟ 중 <가리는 손> p.203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아이 입가에 천진한 흥미랄까, 아는 체랄까 묘한 기운이 어린다.

-틀딱?

그러곤 아차 싶은지 재빨리 미소를 거둔다. 마치 소중한 비밀처럼. 누구에게도 들키면 안 되는 보물인 양 얼른 감춘다. 나는 아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아이가 이상한 말을 뱉어서가 아니라 방금 저 표정을 이미 어디선가 한 번 본 것 같아서. 그런데 어디지? 어디서였지?

(중략)...

재이가 눈을 감고 슬며시 미소짓는다. 그런데 그걸 본 순간 내 속에서 짧은 탄식이 터져나온다. 웃음 고인 아이 입매를 보자 목울대가 매캐해지며 얼굴에 피가 몰린다. 불현듯 저 손, 동영상에 나온 손, 뼈마디가 굵어진 손으로 재이가 황급히 가린 게 비명이 아니라 웃음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정말 그렇다면 그동안 내가 재이에게 준 것은 무엇이었을까.

김애란, ⌜바깥은 여름⌟ 중 <가리는 손> p.219~220

작가 김애란 리디 인터뷰 ⓒinboil

 

 
바깥은 여름
김애란이 돌아왔다. 작가생활 15년간 끊임없이 자신을 경신해오며,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서 있는 곳의 이야기를 우리의 언어로 들었을 때 느끼게 되는 친밀감과 반가움, 그 각별한 체험을 선사해온 저자가 《비행운》 이후 5년 만에 펴내는 신작 소설집 『바깥은 여름』. 제37회 이상문학상 수상작 《침묵의 미래》, 제8회 젊은작가상 수상작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를 포함한 일곱 편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소설집의 문을 여는 작품 《입동》은 사고로 아이를 잃은 젊은 부부의 부서진 일상을 따라가며 독자로 하여금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다가도, 그 고통이 감당 가능한 범위를 넘어섰을 때는 고개 돌려 외면해버리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상기하게 만든다. 십대 무리와 노인과의 실랑이 끝에 노인이 죽는 사건이 일어난 후 그 사건의 목격자인 ‘나’의 아들 ‘재이’가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이유로 부당한 편견에 둘러싸이고, 그런 편견 사이에서 천진하다고만 생각한 아이에게서 뜻밖의 얼굴을 발견하게 되는 ‘나’의 이야기를 담은 《가리는 손》 등의 작품을 통해 가까이 있던 누군가를 잃거나 어떤 시간을 영영 빼앗기는 등 상실을 맞닥뜨린 인물들, 친숙한 상대에게서 뜻밖의 표정을 읽게 되었을 때의 당혹스러움 같은 것을 마주하게 된다. 언젠가 출연한 한 팟캐스트 방송에서 소재를 이야깃거리로 소비하지 않으려 노력한다고 이야기했던 저자의 그 조심스러운 태도가 곳곳에 묻어나는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대다수의 작품들은 어느 때보다 안과 밖의 시차가 벌어져있음을 구체적으로 체감할 수밖에 없던 최근 삼사 년간 집중적으로 쓰였는데, 그 혼란의 시기를 비켜가지 않고 천천히 걸어 나가고자 했던 저자의 다짐을 엿볼 수 있다.
저자
김애란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7.06.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