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해리의 이야기/창작공간 (14) 썸네일형 리스트형 봄빛에 대하여 너의 여름은 어떠니? 이제는 내 곁에 없는 너에게 말한다 너는 푸른 숲 우거진 여름날을 살아가고 나는 태풍 몰려오는 여름밤을 걸어간다 우리의 엇갈린 계절과 닿을 수 없는 시간 하늘이 온통 먹구름으로 가득하다 한차례 거센 바람 불어닥쳐 잎새들이 떨어질 듯 위태롭다 우산을 씌워주던 너의 젖은 어깨를 떠올린다 분명 봄빛을 듬뿍 받았던 잎새들이었을 텐데 영원할 것만 같던 봄빛이 어느샌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져 버리고 너도 나를 떠나 버렸다 우리는 봄빛에 대하여 말했어야 했다 개나리의 꽃말을 말하고 벚꽃의 떨림을 느끼던 그러나 너는 신록으로 가득한 여름날을 살아가고 나는 비바람 몰아치는 여름밤을 걸어간다 어디까지가 오늘 밤이고 언제까지가 우리일까? 민들레떼 하늘에 햇빛이 가득하다 좀처럼 눈을 뜰 수가 없다 나의 눈에 눈물이 맺힌 때문일까 눈물 사이로 하늘을 나는 날갯짓들이 보인다 휘황한 광채와 함께 수평선을 날아다니는 무언가 그것은 천사의 모습인 것인지 그도 아니면 흰 깃털이 달린 갈매기떼들인지 모르겠다 다만 확실한 것은 태양의 빛과 닮아 있다는 것이다 거대한 알바트로스의 날개보다는 작지만 하늘을 자유롭게 유영하듯 날아다니는, 민들레 민들레떼다 초원의 바다 위로 수천 아니 수만 개의 민들레 홀씨들이 아가씨의 설레는 치마폭처럼 다소곳이 하늘 위를 춤춘다 어느샌가 하늘가에 풍등 띄워 놓은 듯 저마다의 햇빛들이 둥둥 떠다닌다 나도 그 사이를 함께 날아가고 싶어 내 어깻죽지에 날개가 달리기를 소망한다 날아보자 날개야 돋아라 이카루스의 오만한 종말이라도 괜찮다 수많.. 우리들이 살고 있는 별에 대하여 우리들이 살고 있는 별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 눈에는 잔혹한 별들의 잔해가 보여요 그녀는 별들이 머지않아 멸망할 거라고 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별이 곧 멸망한다고? 세상은 곧 아무것도 남지 않고 사라져 버릴 거고 우리는 존재하지 않을 거예요 내 눈엔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그건 당신의 생각일 뿐이에요 우리는 죽어가고 있어요 우리는 살아가고 있잖아? 아뇨 우리는 점점 생명을 다하고 죽어갈 뿐이에요 그러면 너는 왜 신을 믿지 않지? 신은 죽었으니까요 신이 죽었다고? 신은 이미 오래전에 인간을 버리고 죽어버렸어요 신이 죽었을 리가 없어 그렇다면 인간은 누구를 믿고 의지하지? 저는 별들의 잔해를 믿어요 별들의 잔해만이 진리이니까요 소리와 음의 분열 창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이 나의 단잠을 깨운다 뭉쳐진 소리들은 사람의 언어가 되고 무리의 폭력이 되어 나의 고막을 터뜨린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가 된다 귀머거리는 자기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가 있다 토스트를 씹는 소리, 담배연기를 빨아들이는 소리, 지층을 울리는 발소리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나에게는 내 소리밖에 없어 다른 것은 침입하지 못한다 이제 그 다른 것을 음이라고 하자 아무리 음악을 크게 틀어놓아도 나의 고막은 그 음들을 저만치 튕겨내 창밖으로 떨군다 오로지 나의 소리들을 방해하는 음이 존재한다면, 존재하기라도 한다면 그것은 나의 단잠을 깨운 뭉쳐진 음들, 음들 속에서 내 소리들은 존재하지 않지만, 언어는 나의 음이 아니지만 폭력은 나의 음이다 좀 더 나의 폭력적인 음들을 듣.. 민들레와 하이에나 민들레의 영토에 한 발짝 들어서자 야트막한 둔덕에 민들레가 고개를 들어본다 하이에나가 시뻘건 잇몸을 보여도 민들레는 새하얀 얼굴만 갸웃거린다 상냥한 미소로 낙오된 떠돌이를 어루만지니 썩고 비린 뼈와 살에 한껏 달아올라 끊임없이 헤매던 시절도 아련해진다 엉기는 장마에 두발이 쓸려가도 참담한 가뭄에 속절없이 뒹굴어도 굳건한 심상에 감탄하며 너의 흔적들을 찾아간다 그러나 애초에 길이 달랐던 것을 언약을 해봐야 무슨 소용 있을까 너대로 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을 말도 없이 일어나 지체 없이 떠난다 아직도 너의 체취 뿌리 끝에 남아서 홀씨 하나 잉태하여 너에게로 날려본다 소하(小下) 중학교 한문 시간에 자신의 자(字)를 짓는 숙제를 받았다 나는 고심 끝에 소하(小下)라고 자를 정했다 이게 무슨 뜻이니? 한문 선생님은 내게 묻는다 작다 아래? 친구들이 깔깔깔 웃는다 걔 중에는 내 사타구니를 가리키며 웃는 녀석도 있었다 아래가 작대 거시기가 작아 한나라의 재상 소하는 지위는 높았지만 행동은 겸허하게 포부는 크지만 마음은 겸손하게 그렇게 살았어요 짝짝짝짝 한문 선생님의 박수소리가 홀로 적막한 교실에 울려 퍼진다 훌륭하구나 소하야, 너는 재상 소하처럼 살아가거라 과거는 어느덧 뉘엿뉘엿 저물어가고 이젠 닳아 무뎌진 펜을 든 채 선생님의 말을 떠올려본다 오늘의 소하는 진정 小下로 살고 있는가 절망의 시 새는 부르짖는다 부리에서 피가 터져 나오고 발톱에 생채기가 나도 새는 부르짖음을 멈추지 않는다 새는 발에 매인 족쇄를 끊임없이 부리로 쪼아댄다 창공을 향한 메아리가 진혼곡이 되어 산천에 울려 퍼진다 새는 날아갈 이정표도, 목을 축일 안식처조차 없다 그저 맹렬히 자신을 묶은 금빛 사슬을 두드릴 뿐이다 새는 이제 쓸모없어진 자신의 날개를 부리로 쪼아댄다 날개가 찢어지고 피가 흘러넘쳐도 새의 탁啄은 끊김이 없다 새는 이제 날 것이 아니다 선홍색 붉디붉은 몸뚱이만이 남아 있다 새는 마지막 함성을 내지르고 바닥으로 바닥으로, 저 밑바닥으로 가라앉는다 가시에 대하여 1. 나의 몸에서 가시가 돋아나면 갈대숲을 찾곤 하지 아무도 들어올 수 없는 금지된 숲 나는 가시를 바짝 세우고 숲을 지나가지 그렇지만 상처 입는 것은 숲이 아닌 나야 피가 갈대에 묻으면 그 위로 또 다른 가시들이 자라나지 그것들이 나를 긁어대면 둥둥둥 북소리들이 어머니의 양수 속까지, 아버지의 은하수까지 울려 퍼지지 안녕 나의 가시야 2. 태초에 하느님이 계셨으니 모두 그를 경배하라 그는 가시의 하느님이시다 그는 가시들을 이루어 거대한 가시 왕국을 이루셨도다 내 아들의 아들의 아들에게까지 가시를 누리게 하리라 나와 나의 연인에게 가시는 금지 되었다 하느님의 품 안에서 우리는 가시에 대한 경배를 외친다 그들의 가시여 3. 물레의 가시에 찔리고 싶다 그리하여 영원한 잠에 빠져들 수만 있다면 독사과를 한 입.. 이전 1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