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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세상 이야기/좋은 글 따뜻한 마음

법정, <구도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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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 있어야 합니다. 왜 절에 가는가? 왜 교회에 가는가? 그때그때 스스로 물어서 어떤 의지를 가지고 가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삶이 개선됩니다. 삶을 개선하지 않고 종교적인 행사에만 참여한다고 해서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명심하십시오. 무엇 때문에 내가 절에 나가는가, 무엇 때문에 내가 교회에 나가는가 그때그때 냉엄하게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일상적인 타성에 젖어서 신앙적인 생활을 하지 않는 사람들보다 훨씬 어리석은 짓을 할 수가 있습니다.

때때로 자신의 삶을 바라보십시오. 자신이 겪고 있는 행복이나 불행을 남의 일처럼 객관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자신의 삶을 순간순간 맑은 정신으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행복과 불행에 휩쓸리지 않고 물들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늘 깨어 있으라고 수많은 영적 스승들이 말하는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는 말은 자기 삶을 늘 주시하라는 뜻입니다. 자기 삶을 주시하고 있으면 고통과 불행이 따라오지 않습니다.

수행의 첫 번째 과제는 자기가 하는 일을 늘 살피는 것입니다. '이 무엇인가?'의 참구가 바로 그 의미입니다. 참선과 염불, 간경(독경, 경전을 읽는 것)을 통해서 자기 자신을 주시하라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살피면 어떤 상황에 처하더라도 고통에 짓눌리거나 흔들리지 않습니다. 힘과 지혜가 그 안에서 싹틉니다. 자기 자신을 주시하면서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살 만큼 살다 보면 언젠가는, 내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할 때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그때 가서 아까워하며 망설일 것 없이, 내려놓은 일을 미리부터 연습해야 합니다. 그래야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습니다.

내려놓는 일도 하나의 수행이고 정진입니다. 단지 물건이나 생각을 내려놓는 데서 벗어나 그 자체가 하나의 수행이 될 수 있어야 합니다. 거듭거듭 털고 일어서는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삶 자체가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서 거듭거듭 성숙해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는 데 지혜와 용기가 생겨서 휩쓸리지 않고 깨어 있는 정신으로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잠들기 전에 자기 삶을 점검해 보아야 합니다. 오늘 하루, 나는 어떤 수행을 했는가? 오늘 하루, 타인에게 무엇을 베풀었는가? 내 인생의 금고에 어떤 것을 축적했는가?

이렇게 점검한다면 하루하루의 삶이 결코 소홀해지지 않고 날마다 새로운 날을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죽은 화두를 가지고 헛되이 시간을 보내서는 안 됩니다. 살아 있는 화두를 가지고 정진해야 합니다. 보리심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화두를 통해 수행의 기쁨을 누려야 합니다. 수행하는 분들, 특히 참선하는 분들, 염불 혹은 기도하는 분들도 낱낱이 살펴보십시오. 내가 간절하게 하는 일이 보리심을 발하는 일인가 아닌가? 내 수행이 남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 좋은 영향을 끼치고 있다면 그것은 바른 수행입니다. 혼자만 좋아서 하는 수행은 바른 수행이 아닙니다.

저는 늘 잊지 않습니다. 내가 과연 안팎으로 출가 수행자답게 살고 있는가? 마음 씀이 수행자로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가? 또 내가 무엇을 위해 이 길에 들어섰는가?

구도자는 이와 같은 자기반성으로 순간순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불교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이라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늘 깨어 있는 상태입니다. 본래의 자기로서 늘 깨어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에겐 늙음이 없습니다. 늘 그 자리입니다. 수행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늙음과 죽음이 있지만, 수행에는 늙음이 없습니다. 늘 깨어 있기 때문에 세월이 비켜 갑니다. 간절한 소망과 원, 행이 없기 때문에 세월이 그곳에 앙금이 이루어서 안주하는 것이지, 늘 살아 있는 존재에게는 세월이 붙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늘 초심, 시작하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초심이 중요합니다. 집을 나왔을 때의 첫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런 간절한 마음을 지니고 있으면 세월이 붙지 않습니다.

좌선은 선방에서 스님들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좌선은 모든 불교도의 기본자세입니다. 부처님의 앉아 있는 모습입니다. 또한 모든 불자들의 기본적인 수행입니다.

좌선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한 수행이 아닙니다. 그 자체가 커다란 환희의 법문입니다. 아무 잡념 없이 우리가 부처님처럼 앉아 있는 이 자체가 커다란 대안락의 법문입니다. 때 묻지 않은 청정 법신의 모습입니다. 거듭 말씀드립니다. 우리가 좌선을 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함이 아닙니다. 그러면 왜 애써서 수행을 하는가? 본래의 밝음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닦지 않으면 오염되기 때문에, 성장의 노력을 하지 않으면 퇴보하고 물들기 때문입니다.

지난 여름, 제게 있어 가장 보람되고 즐거웠던 시간을 꼽으라면, 아침저녁으로 개울물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묵묵히 앉아 있던 그 시간입니다. 책 읽고 밖에 나가서 일하는 시간은 부수적인 것입니다. 아무 생각 없이 묵묵히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조용히 앉아 있을 때가 가장 기쁜 시간입니다. 이것을 선열위식이라고 하는데, 선의 기쁨으로 밥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불자들은 그런 수행을 꼭 안거 기간만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불교 수행자의 기본적인 자세입니다. 그런 자기 충전을 통해 이 험난한 세상을 무난히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만일 자기 충전의 시간이 없다면 늘 중생 놀음, 여기에 팔리고 저기에 휩쓸리며 살아가게 됩니다. 자기 충전의 시간은 곧 자기 중심의 시간입니다. 순수한 자기 존재의 시간입니다. 그런 시간을 될 수 있으면 많이 가져야 합니다.

수행이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말해서 보살행입니다. 남을 위해서 헌신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수행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행보리심이고 보살행입니다. 행의 궁극적인 종점이 곧 깨달음입니다. 신해행증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믿고, 이해하고, 행하면 그 행의 결과로 깨달음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깨닫고 나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행의 완성이 곧 깨달음이라는 사실입니다. 행 속에 이미 깨달음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과일 속에 씨앗이 들어 있듯이.

깨달음이란 무엇입니까? 어느 날 새벽별을 보고 갑자기 사람이 달라지는 것이 깨닫는 일이 아닙니다. 순간순간 새롭게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무명의 구름에서 벗어나 맑은 하늘을 스스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이 물음을 지녀야 합니다. '나는 어디서 왔는가? 무엇을 위해 왔는가?'

우리 자신이 스님인가 일반 신도인가, 불교에 귀의한 지 오래되었는가 몇 해 되지 않았는가에 대해선 물을 필요가 없습니다. 문제는 내가 부처님 제자로서 얼마만큼 자비심을 지니고 있는가, 그 자비심을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하고 있는가입니다.

마음공부란 무엇인가? 기도하고 참선하고 참회하는 일은 진정한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간절한 염원이며 수행입니다. 이와 같은 수행을 거치면서 사람은 인간답게 성숙해 갑니다. 나이를 먹을수록 성숙해져야 합니다. 성숙하지 않고 옛날 그대로 있다면, 그 사람은 전혀 성장하지 않고 제자리 걸음을 하는 것입니다.

각자 한번 물어보십시오. 나 자신, 자아의 실현을 위해서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하루하루 내 생을 소모하며 살고 있는데 과연 자아실현을 위해 내가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

참선이나 기도는 남에게 보이거나 알아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혼자서 은밀히 해야 합니다. 여럿 속에 섞여 있을지라도 은자처럼 처신해야 합니다. 혼자 하는 기도는 조용하게 하십시오. 그렇다고 해서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심을 지녀서는 안 됩니다. 이기심은 수행이 아닙니다. 흔히 기도 할 때 보면 혼자 소원을 다 차지할 것처럼 욕심 사나운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좋다는 기도처에 가 보면 모두가 그렇지는 않지만 탐욕스런 모습을 보이는 사람들이 더러 있습니다.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혼자 복을 받겠다는 생각은 부질없는 짓입니다.

기도하는 사람들은 입으로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을 열심히 부르면서도 자신이 직접 그런 보살이 될 줄은 모릅니다. 그 분들은 역사적으로 과거에 있었던 특정한 분들이 아닙니다. 누구나 관세음보살이 될 수 있고 지장보살이 될 수 있습니다. 입으로만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고 나 자신이 관음의 화신이 되십시오. 남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지장보살이고, 지극한 자비가 관세음보살입니다. 마음 밖에서 찾지 마십시오. 참선하고 기도하는 주체인 마음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마음이 안정되어야 기도와 명상을 제대로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러 절이나 교회에 나올 때 법당이나 교회당 안에 들어서야만 기도가 시작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집을 나설 때부터, 또 차 안에서부터, 지하철 안에서부터 기도하고 명상해야 합니다. 시간에 쫓겨서 빨리 절에 가야 한다, 기도 시간에 늦지 않도록 가야 한다는 바쁜 생각을 가지면 기도도 아니고 명상도 아닙니다. 문을 나설 때부터 기도가 되어야 하고 명상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와 명상은 특정 장소나 정해진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안팎이 한결같아야 합니다. 기도와 명상이 끝나고 나서도 한결같아야 합니다. 대게 보면 방선(참선을 쉬는 것) 시간에 뒷방에서 잡담을 합니다. 기도가 끝나고 나면 기도하던 시간과는 사뭇 다르게 처신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수행자는 이런 것에 속아서는 안 됩니다.

구도의 길도 바람 같은 것이 아닐까요? 끝없이 찾아 나서는 데서 삶의 의미를 거듭거듭 다지는 나그네 길. 날마다 좋은 날이란 말도 있듯이 날마다 새롭게 피어날 수 있는 새날이어야지, 그날이 매양 그날이라면 늪에 갇힌 물처럼 썩게 마련입니다. 물도 바람처럼 흘러야 살 수 있습니다. 운수라는 말에는 매인 데 없이 홀가분하게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면서 산다는 뜻보다도, 늘 살아서 움직이라는 데 본질적인 의미가 있어야 합니다.

선이란 밖에서 얻어 들은 지식이나 이론으로써가 아니라, 자신의 구체적인 체험을 통해 스스로 깨닫는 일이다. 이것은 객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것, 철저한 자기 응시를 통해 자기 안에 잠들어 있는 무한한 창조력을 일깨우는 작업이다. 그래서 선을 가리켜 지식이 아니라 체험이라고 한 것이다. 이 무한한 창조력이 사랑이라는 온도와 지혜라는 빛으로써 이웃에게 발휘될 때 선은 일상 속에서 살아 움직인다.

우리들이 홀로 있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존재하는 것이다. 현대인들은 지나친 접촉으로 인해 홀로 있는 시간을 거의 잃어버린다. 빽빽하게 꽂혀 있는 밀에서 툭 트인 허를 익힐 필요가 있다. 무심한 경지가, 순수 의식의 상태가 아쉽다. 그러므로 홀로 있음은 보랏빛 외로움이 아니라 본래의 자기로 돌아가는 길이다. 그것은 당당한 인간 실존이다. 사람은 홀로 있을 때 순수해진다. 모든 것을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다. 그리고 궁리를 한다. 가장 올바른 것을 생각하고, 깊은 것을 들여다보고, 높은 것에 눈을 주게 된다. 또한 사람이 홀로 있을 때는 죽음이라든가 영원 같은 비일상적인 것을 헤아리게 된다. 저만치서 하루하루 죽어가고 있는 자기 모습을 본다. 껍질에서 알맹이를 찾는다. 그래서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내 삶에 성이 차지 않을 때 나는 입을 다뭅니다. 밖으로 향했던 관심과 시선을 안으로 돌립니다. 묵은 밭을 일구듯이 내 속뜰을 다시 경작합니다. 벽을 향해 허리를 곧추세우고 묵묵히 앉아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합니다. 마음의 바다에 부침하는 사물들을 지켜보면서 스스로를 텅텅 비웁니다. 텅텅 비워버려야 새로운 메아리가 울려옵니다.

안으로 시선을 돌리면 모든 것이 하나로 이어져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 하나의 세계에 마음을 쓰고 그것을 두둔하게 되지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우리 마음에 매인 것임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머리와 입만 커다랗게 열려 있지 가슴과 발은 점점 퇴화되어가고 있는 실정이다. 지극히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인간으로 팔팔한 생명의 빛을 잃어간다. 따라서 대지와의 관계가 그만큼 멀어지고 있다. 더 말할 것도 없이 대지는 모든 생명의 근원.

선은 대지와 밀착할 수 있는 마음과 몸의 단련이다. 좌선은 그 어디에도 의존함이 없이 당당하게 홀로 직립하는 모습. 새삼스레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좌선 그 자체가 본래적인 자아의 살아 있는 모습이고 대안락의 법문이다.

자기 자신을 거듭거듭 구축해나가려면 홀로 있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수행자는 진정한 고독의 의미를 알아야 합니다. 고독을 모르면 때가 묻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무엇보다 말이 적어야 합니다. 어떤 생각이 떠오른다고 해서 그것을 어떻게 말로 다 쏟아버릴 수 있겠습니까. 말이 많으면 마음이 산란해질 뿐 아니라 속이 비게 됩니다.

온갖 모순과 부조리와 갈등으로 뒤얽힌 이 풍진 세상을 살아가려면, 무엇보다도 말짱한 정신으로 항상 깨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살다보면 일상의 타성에 젖어 자칫 게을러빠지기 쉽다. 그 타성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정진하는 길밖에 없다.

안으로 깊이 탐구하는 사람은 새로운 샘물만을 찾아 끝없이 헤매서는 안 된다. 그렇게 되면 항상 목이 말라 갈증을 면할 길이 없다. 일단 샘을 하나 찾았으면 그 샘에서 날마다 길어 마시면서 영혼의 갈증을 달래야 한다.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는 낙숫물이 돌을 뚫는다. 한 개의 물방울은 보잘것없이 미미한 것. 그러나 그 방울물이 모여서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다. 그리고 물은 부드러운 속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부드러움이 쉬지 않고 꾸준히 한곳에 집중을 되풀이하면 돌처럼 단단한 것도 마침내 뚫고 만다는 교훈이다. 우리들이 날마다 행하는 정진도 바로 이런 뜻에서 쉬지 않고 되풀이를 하는 것이다.

그날 하루를 마감하는 잠자리에 들기 전에 단 5분간이라도 좋으니 허리를 펴고 바로 앉아서,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왔는지 한번 반성해보라. 인간답게 살았는지 아닌지를 되돌아보라. 그리고 내가 지금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당신의 마음에 어떤 믿음이 움터나면 그것을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히 간직해 두고 하나의 씨앗이 되게 하라. 그 씨앗이 당신의 가슴속 토양에서 싹트게 하여 마침내 커다란 나무로 자라도록 기도하라. 묵묵히 기도하라.

선은 설명이나 해설에 의해 진리를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 속에 살아 있는 진리를 자기 눈으로 직접 확인하려는 수행이다. 그래서 마음 밖에서 찾지 말라 하고, 문으로 들어온 것은 집안의 진정한 보배가 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얻어들은 지식이나 정보는 언젠가 흩어져 날아가버릴 먼지 같은 것, 거리낌 없는 지혜야말로 그 사람의 무게를 이루고 그의 빛을 발하게 한다.

오늘날처럼 복잡하고 소란스럽고 거칠디거친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단순하게 몰입하는 수행법이 보다 적합할 것입니다. 단순하게 몰입하려면 무엇보다도 자기 자신의 마음의 흐름을 살피는 일이 요긴합니다. 여기에서 주의할 것은, 마음의 흐름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을 '살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마음에 따르지 않고 마음의 주인이 되는 일입니다.

참회는 우리들 인간의 내면생활 가운데서도 가장 승화된 정신적인 현상이다. 자신의 현재와 지나온 자취를 되돌아보고 뉘우쳐 다시는 더 허물을 짓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일은 막힌 인간의 통로를 열어주는 재생의 문이다.

아무리 몹쓸 죄인일지라도 그가 참회의 눈물을 흘릴 때, 그에겐 차마 돌을 던질 수 없다. 이제 새로 움트려는 어린 싹을 보고 누가 감히 짓밟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참회의 속성에는 어린이의 순수가 있어야 한다. 자신의 허물을 표백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저 연둣빛 발아 같은 순수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애써 정진하는 것은 새삼스럽게 깨닫기 위해서가 아니라 본래의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이를 본증묘수라고도 합니다. 왜냐하면 닦지 않으면 더럽혀지기 때문입니다. 깨닫기 위해서 닦는 것과 깨달음을 드러내기 위해서 정진을 한다는 입장은 그 틀이 아주 다릅니다. 어떤 바탕 위에서 닦을 것인가는 각자의 수용능력에 달렸습니다.

기도는 인간에게 주어진 최후의 자산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지능을 가지고도 어쩔 수 없을 때 기도가 우리를 도와줍니다. 겪어본 사람이면 누구나 익히 알고 있듯이, 둘레에 불안한 일이 생겨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안절부절 못 할 때, 간절하게 갈구하는 그 기도가 우리를 도와주고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줍니다.

기도는 어떤 소망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해서는 안 됩니다. 또 그 결과를 바라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것은 불순한 거래요, 계약이나 다름없습니다. 오로지 간절한 마음으로 꾸준히 지속해야 합니다. 기도 그 자체에서 삶의 고마움과 기쁨이 우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이 열릴 때가 옵니다. 마음이 열리면 모든 일은 마음 먹은 대로 됩니다.

출처 : 구글 이미지(구도의 길)

*출처 : <맑고 향기롭게>(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