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워야 할 방학이 어쩐지 무섭고 두려움이 앞선다는 너의 그 불안한 마음을, 어딜고 훨훨 떠나고 싶다는 어린 마음을 나는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너의 글에서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읽을 수 있었음이 심히 서글펐다.
마음하는(마음을 다해 사랑한다는 뜻으로 쓴 말인 듯 하다.) 아우야!
마음 기댈 곳 없이 안타까이 헤매는 너에게 나는 무엇을 줄 수 있을 것인가? 나는 무능하다. 힘이 없구나. 그지없이 안타까워 할 뿐이다. 그러나 결코 실망하진 말아라. 우리들의 앞길은 아직도 멀다. 지금의 고통은 우리들 인격을 완성해 가는 데 하나의 시련으로 봄이 좋을 것이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다음의 말은 루터가 아니라 네덜란드 철학자 스피노자가 한 말이다.)는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세계의 종말이 명백하다 하여도 나는 오늘 능금나무를 심는다’고. 여유 있는 인생의 태도다. 어떠한 고난에 부딪힌대도 자기 할 일은 꾸준히 해 나가는 건전한 생활인의 자세를 배워 봄직도 하지 않겠는가?
아우야!
항시 줄기찬 의욕을 지니고 모든 고난을 박차고 싱싱하게 즐겁게 살아가자. 편지로라도 좋으니까 무엇이든지 고민하고 있는 것, 혼자 생각으로는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것은 나에게 거침없이 물어라. 중에게 아무런 흉허물도 없으니까…….
앞마당에 화단이 생겼다니 참 고마운 일이다. 꽃을 가꾸는 그 고운 마음씨는 얼마든지 높이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무기 대신에 아름다운 화분과 꽃씨를 국제 간에 서로 교환할 수 있는 시대가 와야만 세상도 가히 살아갈 만한 세상일 게다.
고향집에 내려가거든 할머님과 작은 아버님…… 고루고루 문안 여쭈어라. 성남이, 순애들도 무얼 하고 있는지. 인연이 다가오면 언제고 만날 날이 있으리라.
잘 있거라. 많이 읽어라.
1958년 7월 24일 밤, 파초 잎이 후두기는 빗소리 들으면서
법정 합장
*출처 : ⌜맑고 향기롭게⌟(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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