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는 인사법도 가지가지다. 요즘에는 대개 "안녕하십니까?"로 두루 통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밤새 안녕하셨습니까?" 또는 "진지 잡수셨습니까?"처럼 진지한 염려를 주고 받던 시절이 있었다. 또 요 몇 해 전부터는 안면에 따라 손을 꼭 쥐면서 "그새 별고 없으셨습니까?"라고 나직하게 주고받는 경우도 있다. 단순한 인사치레가 아니라 궁금했던 신변의 안부를 묻는 인사다. '별고 없느냐'는 이 문안은 전에 없던 별고 속에서 별난 세상을 별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우리 시대 특유의 별스런 인사말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인사말에는 다분히 시사적인 입김이 배어 있다.
그러나 출세간에 몸담아 살고 있는 선승들끼리 나누는 첫 대면의 인사말은 흔히 오는 곳을 묻는다.
"어디서 오십니까?" 또는 "어느 곳에서 왔는가?" 이런 물음은 수사관들이 불심검문하는 류의 그런 뜻이 아님은 물론이다.
선승들은 석 달 동안 한곳에 머물러 안거 정진하고, 그 후 석 달 동안은 여기저기 다니면서 행각으로 정진을 삼는다. 그러니 '어디서 오는가'라는 물음이 인사가 될 수 밖에. 그러나 이때 묻는 어느 곳은 특정한 지역이나 공간을 가리킴이 아니고 의도적인 '어떤 곳'을 말함이다.
8세기 후반부터 9세기 말까지 무려 백스무 해를 살았던 조주 선사는 당시의 중국에서 '조주고불'이라고 불릴 만큼 뛰어난 선승이었다. 그는 처음 서상원이라는 절에 들어가 사미승이 되었다. 사미란 비구가 되기 전 스무 살 미만의 연소한 견습승을 가리킨다. 열여덟 살 때, 그 전부터 이름을 드렁오던 남전 화상을 찾아간다. 남전은 이때 몸이 고단했음인지 주지실에 누워 있었는데, 한 사미승이 들어와 인사하는 것을 보자 대뜸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다.
"서상원에서 왔습니다."
"허, 그래? 그럼 서상을 보았느냐?"
서상원에서 왔다는 말에 상서로운 상을 보았느냐는 화상의 물음이다. 사미는 지체 없이 대답한다.
"서상은 보지 못했사오나 누워 계신 부처님은 보았습니다."
남전은 벌떡 일어나 앉는다. '보통 물건'이 아님을 보고 내심으로 기뻤던 것이다.
"너는 주인이 있는 사미냐, 주인이 없는 사미냐?"
정해진 스승이 있느냐는 물음이다.
"주인이 있습니다."
"그가 누구냐?"
이때 사미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상을 향해 큰절을 하고 나서 천연스럽게 아뢴다.
"정월이라고는 하지만 아직도 날씨가 매우 춥습니다. 큰스님께서 법체 청안하시옵기 바랍니다."
사미는 이제 남전을 자신의 스승으로 여기고 예배드린 것이다. 남전 화상도 그를 기특하게 여겨 특별히 보살피게 된다.
이와 같이 조주 선사는 어렸을 때부터 선기를 지닌 뛰어난 말재주로 누구나 알아듣기 쉬운 일상적인 대화를 통해 크게 교화를 떨쳤다.
그는 허리에 물병을 차고 손에는 지팡이를 짚은 채 여러 수도원을 편력한다. 그리고 항상 안으로 다짐하기를, '7세 동자라도 나보다 나은 자에게는 기꺼이 배우고, 백 살 된 노인일지라도 내게 미치지 못하는 이에게는 가르침을 베푸리라.'고 했다.
나이 여든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조주(지명, 그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의 동쪽에 있는 관음원의 주지가 되었다. 그 절은 조그맣고 가난하여 겨우 끼니를 이어갈 정도였다. 선사는 여위고 헐벗었지만 몸가짐을 조금도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좌선하는 선상의 다리 하나가 부러지자 타다 만 장작개비를 대고 새끼로 묶어서 사용했다. 누가 새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나설 때마다 선사는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40년 동안 한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도 신도의 집에 편지 한 장 띄우는 일이 없었다. <조주록>을 보면 눈이 번쩍번쩍 뜨이는 대목이 많지만, 선사는 장난기도 대단했던 모양이다.
어떤 지방 장관이 선사에게 물었다.
"큰 스님일지라도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 있습니까?"
선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내가 먼저 들어갈 거야."
"큰 스님께서 어째서 지옥에 들어 가십니까?"
"내가 만일 들어가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대를 만날 수 있겠는가."
또 이런 문답도 있다. 유교의 한 선비가 스님이 짚고 있는 주장자(지팡이)를 보고 탐이 나서 물었다.
"부처님은 중생의 원을 들어 준다는데, 그게 정말입니까?"
"그렇지."
"저는 노스님이 짚고 계신 주장자를 갖고 싶습니다. 주시겠습니까?"
"군자는 남이 좋아하는 것을 빼앗지 않는 법이라네."
"스님, 저는 군자가 아닙니다."
"나도 부처가 아니라네."
우리가 선사들의 어록을 읽는 것은 말재주를 익히기 위해서나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다. 오로지 수행의 덕을 배우기 위해서다. 지식은 자랑을 일삼지만 수행의 덕은 지혜와 자비를 낳는다. 출세간의 대화인 선문답은 사이비들에게는 그 본래의 투철한 대화 정신을 망각하고 한낱 말장난에 떨어질 위험이 따른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선문답은 지식이나 정보의 교환이 아니라 전인적인 지혜의 대화다.
한 나그네가 방랑 끝에 출가 수도승이 되려고 했다. 의지할 스승을 찾아 금강산 신계사로 큰스님을 찾아갔다. 큰방에 엎드려 삼배를 드리고 나니 "어디서 왔는가?"라고 예의 물음이 던져졌다.
"유점사에서 왔습니다."
이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스님은 다그쳐 물었다.
"몇 걸음에 왔는고?"
길을 걸을 때 걸음을 세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선의 세계에서는 흔히 비상식이 상식으로 통한다.
이때 만일 몇 걸음이라고 실제의 걸음을 알아서 대답한다면, 그것은 너무도 어리석은 답이 되고 만다. 그야말로 김이 새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선문답은 말이 떨어지자마자 곧 알아차려 대답해야지 어물어물하면 그르치고 만다. 생사가 호흡 사이에 있듯이 선문답의 생명도 호흡 사이에 있는 것이다.
몇 걸음 왔는가라는 물음에 나그네는 벌떡 일어나 큰방을 한 바퀴 빙 돌고 앉아 "이렇게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통쾌하구나, 나그네의 거동이여. 동지 섣달 설한풍 속에서도 꽃이 피고 나비가 날겠다. 그 장단에 그 춤이로다.'
크스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날로 머리를 깎아 주면서 출가를 허락, 그의 이름을 효봉이라 부르게 되었다. 스승의 이름은 '금강산 도인'으로 불리던 석두 화상이다.
효봉 선사가 대구 동화사 금당선원의 조실로 계실 때 동안거가 끝나는 해제날 법상에 올라 이런 법문을 했다.
"대중에게 묻겠노라. 여기 모인 대중 중에서 숫사자가 낳은 새끼를 본 사람이 있는가? 있거든 이 자리에 나와서 일러 보라."
숫사자가 새끼를 낳다니 일반의 상식으로는 천부당 만부당한 소리다. 그러나 선의 세계에서는 이 또한 당연한 말로 통한다.
암사자가 낳은 새끼도 짐승 가운데서 왕 노릇을 하는데, 숫사자가 낳은 새끼라면 그 용맹이 어떠하겠는가. 그런 사람이야말로 출격장부라고 할 만할 것이다. 말은 태초부터 하나의 비유에 지나지 않는 것, 비유 뒤의 뜻에 그 얼이 담겨 있다. 대중에게서 아무 말이 없자 선사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자를 바랐더니 모두 들여우로구나. 진흑 속에서 언제 금옥이 빛을 발할꼬. 결제할 때는 대중을 형제처럼 여겼더니 해제인 오늘은 대중이 원수처럼 보이노라. 우리가 이곳에 모인 것은 명예와 이익을 얻고자 함도 아니고 옷가지와 음식을 위해서도 아니며 안일을 탐하려는 것도 아니다. 오로지 생사를 해탈하여 부처와 조사의 지혜를 이어 끝없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니라. 게으르지 말고 부지런히 힘쓰라!"
선사는 일흔아홉의 생애를 마치면서 다음과 같은 계송을 남겼다.
'내가 말한 모든 법/그거 다 군더더기/오늘 일을 묻는가/달이 일천 강물에 비치리.'
서산 대사 휴정과 사명 스님이 첫 대면에서 주고받은 문답은 다음과 같다. 사명 스님이 법을 배우기 위해 묘향산으로 휴정 선사를 찾아갔다. 문안 인사를 드리고 나니 "어디서 오는고?" 하고 선사가 묻는다. 사명은 고개를 들어 선사를 바라보면서 이렇게 답한다. "옛길을 따라 옵니다."
이 말은 아득한 옛적부터 도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수도승들이 스승을 찾았던 그 구도의 길을 따라왔다는 뜻이렸다. 선사는 앞산에 쩌르릉 메아리가 울릴 만큼 큰소리로 한마디 한다.
"옛길을 따르지 말라!"
선은 모방과 획일성을 배격한다. 저마다 업을 달리하면서 자기 삶을 살고 있는데, 어째서 남의 흉내나 내면서 범속하게 살려 하느냐는 것이다. 독창적인 자기 세계를 일깨워 개척하지 않고 남이 닦아 놓은 남의 길을 안이하게 가려느냐는 질책이다.
선은 이처럼 모방과 획일성을 거부하는 대신 개인의 특성과 창의력을 존중한다. 두 사람의 석가나 똑같은 달마는 필요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은 인간의 내면에 있는 무한한 창조성에 몰입하여 끝없는 빛과 한없는 목숨을 드러내는 일이다. 끝없는 빛은 지혜를, 한없는 목숨은 자비를 상징한 말. 그러므로 선은 그 어디에도 얽매이거나 거리낌이 없는 자유의 길이다.
진리를 찾는 나그네들이여, 저마다 자기 길을 개척해 나갈 것이지 모방과 획일로 거세된 범속한 길을 따르지 말라.
남의 길을 따르지 말고 자기 길을 당당하게 가라. 1977
*출처 : <서 있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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