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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책, 그리고 작가/시를 느끼며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 이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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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 이병일

 

기린의 목엔 광채 나는 목소리가 없지만,
세상 모든 것을 감아올릴 수가 있지
그러나 강한 것은 너무 쉽게 부러지므로 따뜻한 피와 살이 필요하지
기린의 목은 뿔 달린 머리통을 높은 데로만 길어 올리는 사다리야
그리하여 공중에 떠 있는 것들을 쉽게 잡아챌 수도 있지만
사실 기린의 목은 공중으로부터 도망을 치는 중이야
쓸데없는 곡선의 힘으로 뭉쳐진 기린의 목은
일찍이 빛났던 뿔로 새벽을 긁는 거야
그때 태연한 나무들의 잎눈은 새벽의 신성한 상처와 피를 응시하지
아주 깊게 눈을 감으면 아프리카 고원이,
실눈을 뜨면 멀리서 덫과 올가미의 하루가 속삭이고 있지
저만치 무릎의 그림자를 꿇고 물을 벌컥벌컥 마시는
기린의 목과 목울대 속으로 타들어가는 갈증의 숨을 주시할 때
기린의 목은 갈데없이 유연하고 믿음직스럽게
아름답지 힘줄 캄캄한 모가지 꺾는 법을 모르고 있으니까

- 이병일, [아흔아홉개의 빛을 가진], 제16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출처 :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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