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항기(出港記) / 한기홍
그러니까 출항은
이제 막 씻김굿을 털어낸 갈망 따위들이
그악한 노스텔쟈 침향을 입술에 바르고
해신海神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망망한 새벽노을
그 장쾌한 해신의 치맛자락에 출어깃대를 높이 걸면
아득한 시대를 휘돌아오는 장관,
아라비안 카펫마냥 늠실대는
지중해 마케도니아 선단의 황금갑주 광휘가
21세기 고깃배 이물에 부서진다
나는 어부다
한 삼십 여년 뭍에서 황금을 ?다가 꺾여
꿈 따윈 페기 되고, 누항 오십 줄에
절망의 코뚜레에 워낭소리만 가득안고
이 두려운 창해에 내던져진
79톤 안강망 제3연근해호 갑판원
여명에 거뭇거뭇 선線들이 뭉뚱그려진
포구는 언제나 모태신앙처럼 안온한데,
방파제 너머 이어도횟집 아슴프레 처마 쪽으로
내 심안 주낙에 걸린 애절한 그리움 몇 가닥
환영처럼 출렁 인다
출어닷 출어
시나브로 짙어지는 새벽노을
선적물목 점호 마치고, 금빛 여명 등짝에 진
김선장 뾰족한 갈치 주둥이엔
만선기원 입어신고入漁申告가 싱그럽다
왜 그리 서글피 살아왔을까
포구가 주먹만 해졌을 때까지 우두망찰
갑판대신 멀어지는 육지를 보았다
사물의 속성은 굳어 있는 게 아니라서
모든 게 유전流轉되기도 하는 법
아내와 아이들은 또다시 오지의 갈대처럼
아비를 기다리며 살겠지
어젯밤 포구 해당화모텔에서 부둥켜안은
가족들의 설운 등짝에선,
모질고 질긴 희망의 끈을 적신 오열이
인류의 역사같이 깊게 흘렀었지
이 왜소한 인간 하나의 포한이 이만큼이라면
정녕 이 바다의 질곡은 얼마나 깊을 것인가
그 얼마나 깊을 것인가
쩌엉 쩡
아슴한 수평선 너머에 불콰한 해명海鳴이 지나간다
신비로워라
저만치 튀어 오르는 날치 떼 은빛 비늘이
이 세상 모든 영욕 위에 빛나고 있다
아 아아
살아야 하네, 힘써야 하네, 아름다워져야 하네
저 은빛 날개는 바로 내 꿈의 현신인 게야
강퍅했던 내면에 섬광처럼 투영되는
환희의 빛이여, 존귀한 삶의 오의奧義여
뿌우우 뿍
뱃고동 소리는 유심론唯心論이다
대양으로 나가는 길목엔 항상 흩어진 꿈들이 모인다
그래서 파도는 철썩 그리운 사람들 어깨를 친다
이제 양망揚網물목엔 황금조기, 바라조기, 깡치 말고도
그리움 한 상자 넉넉하리
서기어린 새벽 별, 인간의 길을 묻는다
저 광막한 우주대평원 안드로메다 성운 어느 바다
한 생령의 꿈도 나와 같으리
그러니까 출항은 해신에게 내미는 첫 키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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