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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과 책, 그리고 작가/소설을 음미하며

황정은, <복경> 中 기억에 남는 문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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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고 싶지 않은데 웃어요. 자꾸 웃거든요. 나는 매일 웃는 사람입니다. 웃는 사람입니다, 라고 말하면서 지금도 웃지 않았나요? 웃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요 이렇게 웃습니다. 자꾸 웃거든요, 라고 말하면서도 내가 자꾸 웃거든요. 그러므로 너는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그런 질문을 받으면 나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매일 웃는 사람입니다. 그것 말고 다른 것은 없으니까 그렇게 대답하는 수밖에 없어. 나에게도 질문할 차례가 주어진다면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웃는 사람입니까. 당신은 웃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는 인간입니까. 어떻게 웃고 있습니까. 나는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으로 당신을 어느 정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189

어른이 되어서는 별다른 거리낌 없이 거울을 들여다보게 되었지만 머리통에 관한 콤플렉스는 좀처럼 사라지지 않아서, 지금의 나라는 인간이 형성되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예컨대 누군가 가까운 거리에 서는 경우, 불시에 내 뒤통수를 만지지는 않을까, 긴장합니다. 긴장이 되어서 어색하게 미소를 짓습니다.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191

병원비를 낼 수 없으면 처방을 받을 수 없죠. 병원비가 없어 죽는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진통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식욕이 없고 메스껍고 아무것도 먹을 수 없고 불안하고 가렵고 아프고 죽을 것 같고 불면, 고통, 아파, 살려봐, 나를 좀, 고통스럽다, 이 모든 순간에 방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중략)... 살려내고 싶어도 살릴 수 없는 사람이 죽음을 앞두고 고통으로 괴로워하는데 진통조차 해줄 수 없는 형편이라면 그 마음은 뭐가 되겠습니까. 짐승 아니겠습니까. 짐승이 되어버린 것과 같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나는 돈을 벌어. 그 짐승이 되지 않으려고 돈을 법니다.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193~194

나는 매일 웃는 인간이라서 만성적으로 웃고 있지만 인간은 본래 이렇게까지 웃지 않아도 괜찮은 생물입니다. 왜냐하면 괜찮지 않으니까. 이 정도로 많이 웃는 인간인 내가 별로 괜찮지 않으니까. 당신은 괜찮은가요? 웃고 있나요? 어떻게 웃습니까? 말해 주시겠습니까 당신이 어떻게 웃는지를 자세히 좀. 궁금합니다. 당신은 웃음을 어떻게 경험하는지 내가 몹시 궁금합니다.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195

생글생글 웃으면서 서로의 성과를 목격하고 탐내고 그런데 그 서로간에는 조금의 벽도 없어서, 이 굶주림과 질시와 멸시가 경계도 없이 왔다갔다∙∙∙∙∙∙ 갇힌 물을 휘젓는 거대한 브러시 같은 것이 있어 이것이 모두의 얼굴을 이쪽에서 저쪽으로 쓸어가고 다시 이쪽으로 쓸어오고 이것은 마치∙∙∙∙∙∙ 양념 감자튀김 같고요 그거 몰라요? 롯데리아에서 팔았잖아? 감자튀김이 담긴 봉지에 양념 분말을 붓고 마구 흔들어 먹는 메뉴, 그것과 같은 맛. 같은 양념의 맛. 그래서 이 정도로 서로를 미워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견딜 수가 없는 게 아닐까요? 내 맛인데 니 맛이기도 해. 니 맛인데 내 맛이기도 하고. 내가 왜 너하고 같지? 같지 않은데 같은 맛이라면 결국 같은 건가?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197

내가 실은 웃었습니다. 그것을 기억해두고 싶습니다. 그 웃음을 특별하게 기억하고 싶은 것은 그렇게 웃고 싶기 때문입니다. 뭐랄까 뜨겁게 마른 입속에서 조그맣고 차가운 것이 탁 터진 것 같은 그런 아 뭐라고 말할 수 없어 감질나지만 기쁘게 아 그렇게 웃고 싶습니다. 어차피 매일 웃을 거라면 그렇게 웃고 싶습니다. 그것은 내가 계속 짓는 웃음과 는 다른 웃음이라서 내 웃음이 웃음 아닌 다른 것이라는 점을 좀 생각하게 만든 웃음이었지만 정말, 맛이 있었습니다. 알고 계셨습니까. 웃음에도 맛이 있어. 그것을 알게 해주었으므로 이런 고객은 오히려 귀엽고 유의미하다고 생각합니다.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199

도게자. 이렇게, 인간이 인간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숙이는 자세를 도게자라고 해. 사람들은 이걸 사과하는 자세라고 알고 있지만 이것은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야. 본래 사과하는 자세가 아니다. 이게 뭐냐 하면 자기야, 그 자체야. 이 자세가 보여주는 그 자체. 우리 매장에서 난리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사과를 바라는 게 아니야. 사과가 필요하다면 죄송합니다 고객님, 으로 충분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도 만족하지 않지. 더 난리지. 실은 이게 필요하니까. 필요하고 바라는 것은 이 자세 자체. 어디나 그래 자기야. 모두 이것을 바란다. 꿇으라면 꿇는 존재가 있는 세계. 압도적인 우위로 인간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간으로서의 경험. 모두가 이것을 바라니까 이것은 필요해 모두에게. 그러니까 나한테도 그게 필요해.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201

미친다는 것은 껍질이 모조리 깎여 알맹이로 벗겨진다는 것이고 알맹이로 벗겨진 인간은 무섭겠죠 모든 게. 세상은 모서리와 첨단으로 가득하니까. 세상은 이렇게 찔러대고 무서운 것, 투성이니까 울어야죠 무서우니까. 그런데 도대체 왜 웃는 걸까요 미친년은. 당신은 어떻게 웃습니까. 나는 이렇게 웃습니까. 구겨집니다. 얼굴이 종이 공처럼 비고, 그 공허한 중심을 향해 바삭바삭 구겨집니다. (중략)... 웃고 싶은 일이 진심으로 많은 사람이라면 이 정도로 구겨지지 않고도 웃을 수 있지 않을까. 어떻습니까. 웃고 싶습니까. 웃고 있습니까. 여기서는 당신이 어떻게 웃는지를 볼 수 없습니다. 말해주시겠습니까. 어떻게 웃는지를 자세히 좀. 궁금합니다. 당신이 웃는 것을 어떻게 경험하는 인간인지 내가 몹시 궁금합니다. 웃고 있습니까. 웃고 싶습니까. 웃늠입니까. 웃음입니까. 웃고 있습니까. 왜 너는 웃지 않냐 장난하냐 내가 지금 웃는데. 이렇게 웃는데. 웃는다. 내가 지금 웃는다.

황정은, ⌜아무도 아닌⌟ 중 <복경> p.210~211

*복경 : 행복과 경사를 아우르는 말.

 

출처 : https://summer-summer-2.tistory.com/7

 

 
아무도 아닌
황정은의 세 번째 소설집 『아무도 아닌』. 《파씨의 입문》이후 4년여 만에 펴내는 소설집으로, 2012년 봄부터 2015년 가을까지 발표한 여덟 편의 단편소설을 묶었다. 2014년 이효석문학상 수상작 《누가》, 2014년 젊은작가상 대상 수상작 《상류엔 맹금류》, 2013년 젊은작가상 수상작 《上行》이 수록되어 있다. 어쩔 수 없는 이 세계의 시민이자 작가로서 황정은이 그 시간을 정직하게 통과해오면서 놓지 않았던 고민의 흔적과 결과들을 특유의 낭비 없이 정확하고 새긴 듯 단정한 문장들로 담아냈다. 이 책에 담긴 여덟 편의 작품을 한데 모아 읽는 일은 단순히 훌륭한 예술작품을 경험하는 것을 넘어, 지금 이 순간 바로 인간이라는 삶의 자리에 독자인 자신을 다시금 위치시키는 일이 될 것이다.
저자
황정은
출판
문학동네
출판일
2016.1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