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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입동> 中 기억에 남는 문장들 ​한동안 집이 생겼다는 사실에 꽤 얼떨떨했다. 명의만 내 것일뿐 여전히 내 집이 아닌데도 그랬다. 이십여 년간 셋방을 부유하다 이제 막 어딘가 가늘고 연한 뿌리를 내린 기분. 씨앗에서 갓 돋은 뿌리 한 올이 땅속 어둠을 뚫고 나갈 때 주위에 퍼지는 미열과 탄식이 내 몸 안에 고스란히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퇴근후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우면 이상한 자부와 불안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어딘가 어렵게 도착한 기분. 중심은 아니나 그렇다고 원 바깥으로 밀려난 건 아니라는 안도가 한숨처럼 피로인 양 몰려왔다. 그 피로 속에는 앞으로 닥칠 피로를 예상하는 피로, 피곤이 뭔지 아는 피곤도 겹쳐 있었다. 그래도 나쁜 생각은 되도록 안 하려 했다. 세상 모든 가장이 겪는 불안 중 그나마 나은 불안을 택한 거라 믿으려고 애썼..
가방 / 송찬호 가방 / 송찬호 가방이 가방 안에 죄수를 숨겨 탈옥에 성공했다는 뉴스가 시내에 쫘악 깔렸다 교도 경비들은, 그게 그냥 단순한 무소가죽 가방인 줄 알았다고 했다 한 때 가방 안이 풀밭이었고 강물로 그득 배를 채웠으며 뜨거운 콧김으로 되새김했을 줄 누가 알았겠냐고 했다 끔찍한 일이다 탈옥한 죄수가 온 시내를 휘젓고 다닌다면 숲으로 달아난다면 구름 속으로 숨어든다면 뿔이 있던 자리가 근지러워 뜨거운 번개로 이마를 지진다면, 한동안 자기 가방을 꼼꼼히 살펴보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열쇠와 지갑과 소지품은 잘 들어있는지 혹, 거친 숨소리가 희미하게나마 들리지 않는지 그 때묻은 주둥이로 꽃을 만나면 달려가 부벼대지는 않는지 -2008년 미당문학상 수상작
기나긴 겨울의 시작 / 김애란, <입동> | 소설 감상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제주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인근 해상에서 침몰하면서 승객 304명이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한 사건. 우리는 그 사건을 '세월호 참사'라고 부른다. 그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귀한 목숨을 잃어 바라보는 이들의 안타까움과 놀라움을 자아냈던 세월호 참사. 우리는 지금 세월호 참사를 어떻게 부르고 있는가. 사람들은 처음에 어린 학생들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했다. 직접 안산의 단원고를 찾아 애도를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점점 지나가면서 애도라고 부를 수 있는 행위는, 유가족들만 하고 있었다. 다른 이들은 애도를 지켜보면서 그만 털고 일어나라며 채찍질을 해댔다. 그것은 유가족들에게 더 큰 상처로 다가왔다. 우리는 위로라는 미명 하에 실제로는 유가족들에게 폭력을 ..
21이 사랑한 작가 박상영① “이 순간을 날것 그대로” 21이 사랑한 작가 박상영① “이 순간을 날것 그대로” h21.hani.co.kr ‘@novelistpark’. 그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 아이디다. 자신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공간의 주제어에 그는 다른 단어 대신 ‘소설가’라는 직업을 써놓았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트위터엔 writer, 인스타그램엔 작가라고 추가 설명을 달며 ‘작가’라는 정체성에 못을 박았다. 마치 ‘나는 작가다’라고 스스로에게 말하듯이, 글을 쓰는 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라는 듯이. 그러나 반전. 소설가와 작가, 연달아 내걸린 문학이라는 무게감에 독자가 행여나 짓눌릴세라, 다른 문구가 뒤따라온다. ‘책 구매 링크는 아래’. 그답다는 생각이 든 건 인터뷰를 마치고 나서였다. ‘대세 작가’ ‘젊은 작가’를 꼽을 때 빠지지 않는 이름, 박상..
충분해 A와 B가 골목에 주차를 하고 있었다. 주차를 한 뒤, A와 B는 밖으로 나와 주차가 잘 됐는지 확인하고 있었다. ​ 그때, B가 왈, "좀 더 뒤쪽으로 댔어야 하지 않나?" ​ A가 왈, "충분해." ​ 그러자, B 역시 "그래, 충분해." ​ 그 둘은 얘기를 주고 받으며 골목길을 걸어갔다. ​ 이것은 내가 담배를 피우면서 바라본 풍경이었다. 우리는 과연 나와 타인에 대해서 충분하다고 여기고 있는가. 뭔가 불만족스러움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가. 좀 더, 좀 더, 좀 더... 기대하고, 욕심을 부리고, 가지고 싶어하지 않는가. 나는, 가족들은, 친구들은 우리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충분한 사람들이다. 그대는 충분한 사람인가? 그대의 상황은 충분한 상황인가? 우리 모두 충분해지자. 그렇게 살아가자. - 다이어트..
냉정과 열정 사이 2022년 8월 14일,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와 나는 만났다. 그는 자신의 승용차를 끌고 왔고 나는 그를 아파트 입구에서 반겼다. 착하고 순딩 순딩하게 생긴 그를 본 순간, 나는 대형견 리트리버가 떠올랐다. 꼬리를 살랑거리며, 반려인을 향해 애교를 부리는 그런 모습. 하얀 얼굴과 큰 눈, 서글서글한 얼굴, 뽀얀 피부. 뭔가 찹쌀떡이 연상됐다. 하얀 가루를 잔뜩 묻힌 찹쌀떡. 그만큼 그가 귀엽게 느껴졌다. 그래서 그를 꼭 껴안았던 것 같다. 그날 이후, 우리는 2주 동안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다. 그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그와 나는 서울과 서울 근교의 명소와 맛집을 돌아다녔다. 그 장소들은, 그리고 사진들, 기억들은 하나하나 우리에게 의미 있는 추억으로 남았고, 우리의 관계는 점차 깊어졌다. 이제 한..
몽실이와 꼬북이의 첫 만남 2018년 1월 29일, 우리는 처음 만났다. 물론 그전까지 페이스북을 통해서 서로 대화를 나누고 친해지기는 했지만, 실제로 얼굴을 마주한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다. 만나기 전에 우리는 항상 페이스북 메신저(이하 페메)로 통화를 했는데, 그 이유는 꼬북이의 핸드폰이 2G 폰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직도 2G 폰을 쓰는 사람이 있단 말인가.) 꼬북이가 쓰고 있는 2G 폰은 잘 터지지도 않을뿐더러 속도가 느려서 통화하기가 여간 난감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요즘 wifi는 어느 집에나 설치되어 있으니, 페메로 통화하게 된 것이었다. 꼬북이의 목소리는 보통 성인 남성의 목소리였는데, 말투가 조금 특이했다. 분명 경상도 사투리 같은데, 부산 같기도 하고 대구 같기도 한 사투리였다. 꼬북이는 포항 사람이기 때문에 ..
그대에게 보내는 편지 나, 그대에게 편지를 보내오 수많은 인파로 둘러싸인, 이 텅 빈 광장에서 아마 그대는, 내 편지를 받아보지 못하리라 수신인 없는 편지는 한낱 불쏘시개일 뿐 아마도 그대와… 나는 영원한 절름발이일 것이오 고로, 내 편지는 허공 속을 헤맬 것이오 나는 그대를 사모하오 또한, 그대를 증오하오 아마도 그대와… 나는 사시의 눈깔일 것이오 우리는 결코 마주 볼 수 없으리라 나는 그대를 증오하오 또한, 그대를 사모하오